cha-cha's missing link

방대한 하이퍼링크 세계에서 무엇에 주목할 것인지 고르고, 수집하고, 엮어내는 과정에서 의미의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나의 도구이다. 끊임없이 세상이 넓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내 안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출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드러내기’이다. 출판은 조용하지만 강한 방법이다. 넌지시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이 움직인다.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자신의 목소리와 관심을 기록하고 보여주려는 욕망은 정치적이며, 일종의 선언이다.
  ‘드러내기’에 대해서는 어렸을 적부터 이상하게 반응했다. 싫으면서 그런 자리에 언제나 스스로를 밀어넣는, 꼭 마지못해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무대에 오르면 긴장이 되어도 그 긴장을 즐겼고,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독자를 염두에 두며 썼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혹은 실수로 세상에 공개되는 게 아니라 정말 보여질 것을 상상하며. 그렇다고 검열은 아니다. 치부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경험한 이후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안 두고는 별 차이가 없다. 독자가 없는 글쓰기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상호 의존 관계에서 작용한다. 도울 때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며, 누군가를 도왔고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을 얻으니 모두가 득을 보는 것이다. (윈윈) 도움이라는 단어에서 이기심을 볼 수 있다. 결국 돕는 게 아니라, 도움을 받는 대상이 내가 도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그 대상이 나를 돕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도움의 요청이 있다는 것은, 그만한 신뢰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도움으로 인해 해결되는 것이 있다면 뿌듯함도 있다. 결국 자신의 만족도를 채우고, 자신감도 채워지는 것이다. 결국 도움은 선한 게 아니라, 그저 만족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무의식을 나타내는 영상이다. 처음보는 인물이나 다른 것이 등장할지라도 그것은 나이다. 그냥 꾸어지는 꿈은 없다. 특히 반복적으로 꾸는 꿈은, 어떤 상황에서 반복되지는 유추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시작에 놓였을 때 다리 찢기에 성공하는 꿈을 꾼다. 꿈은 현재 내가 어디에 가장 집중되어 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는 지표이다.


애정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입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애정하지 않으면 궁금하지 않고, 궁금하지 않으면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질문은 가볍다. 반대로, 질문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묻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정을 담았다고 해도 결코 애정이 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느슨한 공간이다. 꼭 사적인 공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고, 입장하는 순간 편안함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공간이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 집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집에게 그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순간 들어가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나의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 곳곳 언제 어디서든 집에게 요구했던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하이퍼링크처럼 느껴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우주에서 보내는 메시지는 매일을 낯설게 만들고, 이미 아는 것을 다시 알아보게 한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자, 지극히 개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상황과 가치관에 맞춰 자유롭게 해석된다.


인식해야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회복하기 가장 좋은 방법.


헨젤과 그레텔이 흘려놓은 빵 부스러기를 줍는 것. 새로운 접근과 방향이 생기는 것.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기쁨. 내가 확장되는 경험 속에 있는 것.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섬세함이다.